> 포토이미지

한국 처용탈

관리자

처용탈은 처용무(중요무형문화재 제 39호)에서 쓰이는 탈이다. 처용무는『삼국유사』권 제 2「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조를 통해 그 유래를 살펴볼 수 있다.

신라 4대 헌강대왕이 개운포(開雲浦) - 학성 서남에 있으니 지금 울주(蔚州) - 에 나가 놀다가 바야흐로 돌아가려 했다. 낮에 물가에서 쉬는데, 문득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게 되었다. 왕은 괴이하게 여겨 측근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서 이를 풀어야 될 것입니다.” 이에 사무를 맡은 관원에게 명령하여 용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이 일로 말미암아 지명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며 이에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임금을 따라 서울에 들어가서 정사를 도왔으니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미녀를 처용에게 아내로 주어 그의 생각을 잡아두게 했으며, 또한 급간(級干)이란 관직을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어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그녀와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자리에 두 사람이 누웠음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서울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니다가, 들어와서 자리를 보니, 가랭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이뇨, 본디는 내 것이다만은,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형체를 나타내어 처용이 앞에 꿇어 앉아 말했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그녀를 관계했는데,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시니 감동하여 칭송하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 후로는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귀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 처용설화는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대의 것이다. 이 설화 처용을 문신(門神)으로 신격화하면서, 처용의 모습이 역귀를 퇴치할 수 있는 주술력을 갖게 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설화에서 처용무에 관계되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렇게 시작된 처용무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나례와 연회 등에서 계속 전승되었고 탈을 착용하고 역귀를 쫓아내는 춤을 추었다.
조선 성종 때의 『악학궤범(樂學軌範)』제 5권 <학(鶴)·연화대(蓮花臺)·처용무(處容舞)·합설(合設)> 조의 처용가에서는 처용의 생김을 “넓은 이마, 무성한 눈썹, 우그러진 귀, 붉은 모양(얼굴), 우묵한(우뚝 솟은) 코, 밀어나온 턱, 숙어진 어깨”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악학궤범(樂學軌範)』제 9권 관복도설(冠服圖說) 중 처용관복도설(處容冠服圖說)에 처용탈이 그려져 있고, 처용의 복식 및 처용탈 제작에 관한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처용을 동해용왕의 아들로 소개했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처용을 이슬람 상인으로 보는 견해가 큰 지지를 받고 있다.
 
 
 
103
1419464